이탈리아 토스카나 빈치(Vinci)에서 태어나 빈치 출신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생아로 정규 교육을 못 받아 라틴어도 몰랐지만 르네상스 미술사에 20점 밖에 되지 않는 작품에서도 500년째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전 세계인이 찾아오는 거장. 부유하지 않아 후원에 의존하며 작품 활동 했지만 진정한 예술과 진리 탐구의 갈망자였던 그의 삶을 이번 글에서 재조명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과 개척했던 기법들, 철학 등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스승을 능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빈치 마을에서 공증인 아버지와 하층 계층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당시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도 몰랐습니다. 14세 무렵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7년간 수련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476년 스승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 작업을 돕던 때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왼쪽 구석의 천사 한 명을 그렸는데 스승 베로키오가 그 솜씨를 보고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제자에게 완전히 압도된 것입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완성한 그림보다 미완성으로 남긴 그림이 더 많았습니다. 의뢰받은 작품을 중간에 내팽개치고 새로운 연구에 빠져드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서비스를 제안할 때도 이전 의뢰 작품들이 모두 미완성 상태였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다빈치는 역사상 가장 많은 미완성 작품을 남긴 천재이기도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대표 작품과 기법 비교
| 작품 | 제작 시기 | 핵심 기법 | 특징 |
|---|---|---|---|
| 그리스도의 세례 천사 부분 | 1476년 | 스푸마토 초기 적용 | 스승 베로키오를 압도한 첫 작품 |
| 암굴의 성모 | 1483~1486년 | 스푸마토 키아로스쿠로 반사광 | 최초로 스푸마토 완성 적용 |
| 최후의 만찬 | 1495~1498년 | 선원근법 소실점 구성 | 소실점이 예수 얼굴 중앙에 정확히 위치 |
|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 1490년경 | 수학적 인체 비례 | 인체와 기하학의 일치 증명 |
| 모나리자 | 1503~1519년 | 스푸마토 대기 원근법 | 16년에 걸쳐 완성 윤곽선 없는 최초의 초상화 |
스푸마토 자연에 윤곽선이 없다는 것을 처음 그림으로 구현하다
레오나르도의 가장 혁신적인 기법은 스푸마토입니다. 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 사라지다는 뜻으로 레오나르도가 직접 창안하고 명명한 기법입니다. 핵심은 윤곽선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화가들은 인물 주변에 선을 그어 경계를 표시하였는데 레오나르도는 자연에는 윤곽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였습니다. 현실에서 물체와 배경의 경계는 선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 색의 차이로 구분됩니다. 기술적으로는 반투명한 유약을 극도로 얇게 수십 겹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구현하였습니다. 모나리자의 경우 입술과 주변부를 서른 번 이상 붓질하였으며 각 유약층의 두께가 0.1밀리미터도 안 될 정도로 얇았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도 스푸마토 때문입니다. 입꼬리 주변의 윤곽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관람자의 시선이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미소의 정도가 다르게 인식됩니다.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스푸마토는 인간의 시각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회화로 구현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원근법의 완벽한 구현
1495년부터 1498년까지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이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입니다. 화면의 모든 소실점이 정확히 예수의 얼굴 중앙에 위치합니다. 관람자의 시선이 어디서 시작하든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에게 집중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천장의 격자 패턴, 좌우 벽의 태피스트리, 뒤쪽 창문의 배치가 모두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하면서 평범한 식당 벽이 깊이감 있는 공간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프레스코가 아닌 실험적인 템페라와 유화 혼합 기법으로 그렸습니다. 젖은 벽에 빠르게 그려야 하는 프레스코의 시간 압박이 자신의 완벽주의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완성 직후부터 박락이 시작되었고 현재 우리가 보는 최후의 만찬은 수차례 복원을 거친 모습입니다.
해부학 연구 과학자이자 화가였던 다빈치
레오나르도는 인체를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 해부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관찰하면서 수백 장의 해부학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당시 교회가 시신 해부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의 허가를 받아 야간에 작업하는 방식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규 의학 교육을 받지 않은 레오나르도의 해부도에는 틀린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연구가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사후에야 알려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이 연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고대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주장한 인체 비례론을 레오나르도가 직접 사람들을 측정하여 검증한 작품으로 배꼽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손과 발끝에 닿고 팔을 벌린 너비는 키와 같다는 수학적 원리를 시각화하였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레오나르도의 인체 연구는 예술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가장 완성된 사례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철학과 르네상스 미술사에서의 의미
레오나르도는 스스로를 화가보다 자연의 탐구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림 그리기는 자연을 이해하는 수단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노트를 거울 글씨로 썼는데 아이디어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설과 왼손으로 쓸 때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였으며 시장에서 새를 사서 풀어주는 것을 즐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레오나르도의 의미는 단순히 위대한 작품을 남긴 화가를 넘어섭니다. 사생아 출신으로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관찰과 독학으로 시대를 앞섰습니다. 스푸마토로 회화의 언어를 바꾸었고 최후의 만찬으로 원근법의 정점을 보여주었으며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으로 예술과 과학의 통합 가능성을 증명하였습니다. 1519년 프랑스 앙부아즈에서 67세로 사망하였으며 프랑수아 1세 왕이 임종을 지켰다는 전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질문들은 지금도 우리 앞에 살아있습니다.